반 고흐, 10년간의 기록전.
일시 : 2014년 10월 18일 ~ 2015년 3월 1일
장소 : 용산 전쟁기념관 내 기획 전시실
미루다 미루다 전쟁기념관에 갈 일이 생겨
반고흐를 마지막날에서야 만난다.
** 사진의 순서는 시기와 맞지 않을수 있음 **
전쟁기념관 내 고흐전 들어가는 입구.
입장료 어른 15000원. 청소년 12000원. 어린이 8000원.
1853년 3월 30일 네델란드 북부 준데르크에서 목사인 아버지 밑에서 첫째 아들로 태어난다.
1872년 (19세) 동생 테오와 편지 교환을 시작한다.
1875년 (22세) 5월,구필 화랑의 파리 본점으로 정식 발령 받은 후
미술품 거래보다는 성경에 빠져든다.
1877년(24세) 도르트레이트에서 서점 점원으로 일하다 암스트르담의
요하네스 숙부집에서 신학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공부한다.
1878년(25세) 신학공부를 그만두고 보리나주로 알려진 벨기에의 광산촌으로 들어가
평신도 설교자가 되어 광부들에게 성경을 가르친다.
데생에 관심을 보이며 목탄화를 그리기 시작한다.
1880년(27세) 동생 테오와 편지 교환을 다시 시작하고 테오의 제정적 후원에 의해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벽면 가득 그의 일대기에 맞춰
데생과 목탄화부터 시선을 압도한다.
그의 동생 테오는 고흐가 예술에 집중할수 있도록 재정적으로 지원한다.
테오가 없었다면 고흐가 그림을 그리지 못했을 정도로
재정적 지원과 660 통이 넘는 많은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그림과 그의 내면세계, 그리고 삶에 관한 진솔한 이야기을 나누게 된다.
이번 전시회는 유화 작품을 직접 보는것이 아닌
반 고흐의 유명 작품들을 디지털 영상으로 제작하였다.
조금은 실망스럽지 않을까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그 거대한 영상으로 바라보는 움직임에 압도당하지 않을수 없다.
1882년(29세) 헤이그로 가서 안톤 모베에게 사사 받는다.
창녀 시엔을 만나 동거하며 그녀를 모델로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폭풍이 몰아치는 슈브닝겐 해안(1882년)
바람소리 물소리가 실제 바다 한가운데에 있는것처럼 휘몰아친다.
스크린 앞에 서 계시는 여자분이 나와 주시길 바래 보지만
굳건히 자리를 지키신다..ㅎ
고흐는 밀레를 존경했고 그와 같은 농민화가가 되길 바랬다.
그래서 초창기 그림은 어두운 톤으로 농민들을 소재로 삼게 된다.
1884년(31세) 누에넨에 아틀리에를 얻어 농부,풍경을 소재로 그린다.
1885년(32세) 아버지 반고흐 목사가 사망한다. 감자 먹는 사람들을 제작하고
일본 우끼요에 판화들에 열광하고 영향을 받는다.
감자 먹는 사람들.
~~파리에서~~
1886년(33세) 파리에 체류하며 인상주의 화가들,로트렉 피사로등과 교류한다.
인상파 화풍의 영향을 받는다.
파리에서 동생 테오와 합류한 고흐는,
당시 파리에서 유행했던 인상주의 화가들과 교류하면서
이전의 어둡고 암울한 색체에서 완전히 벗어나
가벼운 붓 터치의 색점과 색체로 전환을 꾀한다.
소재 또한 파리의 일상적 도시 풍경과 카페,도시인들의 초상과
삶을 다소 밝은 붓 터치로 나타내었다.
이 시기를 다룬 영상은 그 이전의 다른 작품보다 경쾌한
뉘앙스로 표현했다.
도시와 기차의 움직임이 이를 대변하고 있다.
고흐는 이 시기 네델란드의 향수를 자극하는 풍차와
파리의 대표적 상징인 센 강변의 다리 등을 여러 점 그리기도 했다.
거대한 다리 모양의 형상에 직접 비추어진 영상 작품은
이국적 풍광을 자아낸다.
나란히 걷던 여인들이
어느새 한 여인은 저 멀리 앞서 나갔다.
영상전을 보는 재미이기도 하다.
한폭의 그림이 한편의 영화처럼 재탄생되었다.
1886년 파리로 간 고흐는 탕기영감이 운영하던 클로제 거리의 그림물감 상점에서
로트렉, 베르나르, 러셀,앙크탱 등을 민난다.
그후 인상주의 화가들 고갱과 기요맹,쇠라 등을 알게돼
어울리게 되고 점묘법의 기법에 심취하기도 한다.
일본풍의 그림에도 관심을 갖고 빠져들기도 한다.
비오는 날의 다리(1887년)
일본풍의 영향을 받은 그림이다.
점묘법을 이용한 화려한 색감이 전시장 가득
눈길을 사로 잡는다.
어두운 화풍에서 밝은 화풍으로(파리 1866~1888)
모델료를 구할수 없던 고흐는 자화상과 정물화를 그리며
색의 강렬한 대립과 조화를 습득한다.
눈도 기괴하게 양쪽의 위치가 다른데다가 깜빡일때마다
눈을 감은 사진을 만나기도 한다.
~나는 우울증에 걸리거나 비뚫어지고 적의에 차서
성을 잘 내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파리 시절, 여동생 윌에게 보낸 편지에서..
1년 6개월의 파리에서 고흐는 자화상,정물화,몽마르트르 풍경 등
200점이 넘는 작품을 남겼다.
색색이 변하는 화면들.
그림에 관심없고 재미없어 하던 아이들과 어른들에게도
움직이고, 말하고, 들리는 화려한 영상은
절로 그림에 빠져들게 한다.
이 시기에 그린 자화상들.
여자 석고 토르소(1886년)
이 시기 고흐는 석고상과 정물, 인물화를 많이 그렸다.
벵 화랑에 전시된 일본 그림에 강한 충격을 받은 뒤 그의 그림의
색체는 더 밝아지고 양식도 많이 변하게 된다.
성공하려면 야망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내겐 야망이 어리석게 모순이라 느껴진다.(1887년 여름)
~아를에서(1888년 2월~1889년 5월)~
1888년(35세) 파리를 떠나 아를르로 이주하여 노란색 집에서 작품에 전념한다.
해바라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고갱과의 싸움으로 자신의 왼쪽 귀를 자르고
고갱과 완전히 결별한다.
고흐는 평화로운 마을을 동경하여 프랑스 남부의 아를로 이주하고
아름다운 자연을 자신만의 색채와 화풍으로 확립한다.
1888년 2월 20일 고흐는 눈 내리는 아를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고흐는 꽃이 핀 과일나무 연작에 몰입한다.
모네가 여러 작품으로 구성된 연작을 그렸던것 처럼 고흐도 꽃나무 그림을
각각 분리된 작품이 아니라 하나의 연작으로 생각하고 작업을 했다.
아를의 다리와 빨래하는 여인들(1888년)
원작을 변형해 전시관을 잇는 하나의 통로가 되었다.
이번 전시의 특징은 그림속의 사람들이 살아 움직인다는 점이다.
끝에서 걸어오던 양산 쓴 여인이 어느새 다리 중간을 지나고..
아를에서의 인물화들.
그리고 걸작 해바라기가 아를에서 탄생한다.
다섯송이,열두송이,열 다섯송이 ...
아를의 노란 집(1888년)
고흐는 노란집을 꾸며 아틀리에로 삼고 고갱과 공동생활을 시작한다.
고흐의 침실.
별이 빛나는 밤에.
사이프러스(삼나무라 해야 맞을지 실편백나무 종류라 해야할지는 잘 모르겠다.)
사이프러스 나무는 고흐가 좋아했던 연작 주제중 하나다.
고흐는 "오벨리스크처럼 아름다운 선과 균형을 가졌다.
이제껏 그것을 다룬 그림이 없다는 사실이 놀라울 정도다" 라며
사이프러스 나무의 형태와 미를 극찬했다.
그의 많은 그림엔 사이프러스 나무가 등장한다.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도 사이프러스의 매력에 빠졌노라 얘기한다.
별이 빛나는 밤에도 여전히 등장하는 사이프러스.
화면 가득 황금빛 밀밭과 사이프러스가 춤을 춘다.
고갱의 의자(1888년)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펼쳤지만
고갱과의 불화로 자신의 귀를 자르고 발작을 일으켜 아를의 병원에 입원한다.
1889년(36세) 귀를 자른 자화상을 그린다. 동생 테오는 결혼을 한다.
여러차례의 발작으로 생 레미의 정신병원에 들어간다.
그곳에서 별이 빛나는 밤에 등를 제작한다.
아를의 병원 안쪽 뜰.(1889년)
고흐는 떠난 고갱에게 보낸 편지에서
~모든 일이 늘 좋아지고 있는 이 멋진 세상에서 결코 어떤 악의도 없었다는 점을
자네도 분명히 알아주기 바라네.. ~
그리고 동생 테오에게 안심 시켜달라 부탁한다.
그뒤 편지에서도 모든 잘못은 자신에게 있다 말하고 자신을 책망한다 썼다.
아를에서 우리에게 가장 강렬함으로 남아 있는 그림중 하나.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에~의 영상이 화려하게 펼쳐진다.
아마 이번 전시회중에 가장 화려한 영상이 아니었을까 싶다.
도심의 불빛이 론강으로 반영되고
하늘의 별은 반짝이고 곳곳에서 폭죽이 터진다.
실제처럼 팡팡 터지는 폭죽.
HD 4M의 스크린에 론강이 화사하게 빛나고 있다.
아주 노랗고 환한 밀밭 그림을 그렸는데
아마 나의 그림중 가장 밝은 작품이지 싶다.(1889년 6월 25일)
~오베르 시기는 고흐가 권총 자살로 비극적 생을 마감하기까지로
오베르 하숙방에에 머물면서 약 석달 동안 80여점의 작품에
열정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불태웠던 시기다.~
노란색 밀짚모자의 농부소녀(1890년)
의사 가셰의 초상(1890년)
피아노에 앉은 가셰의 딸
코르드빌의 초가집(1890년)
자살하기 두달 전쯤의 오베르의 풍경들이다.
고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일각에선 고흐가 자살이 아닌 타살이라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다.
여러가지 정황상 범죄과학 전문가 외에도 일반인들도 타살설이 제기되고 있지만
이제와서 무엇이 진실인지는 고흐 자신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오베르 와즈강의 강기슭에서(1890년)
오베르의 집 1890년.
오두막집들(1890년)
비 내리는 오베르 (1890)
까마귀가 있는 밀밭(1890년 7월)
거대한 스케일로 재현된 까마귀 나는 밀밭은 고흐 최후의 작품으로
황금빛으로 출렁이는 밀밭은 고흐가 숨을 거둔 장소이기도 하다.
노란 밀밭위로 까마귀 떼가 어지럽게 움직이는데
이는 고흐의 정신과 죽음을 예지해주는 듯한 형상을 띠고 있다.
1890년(37세) 브뤼셀의 전시회에 유화 6점이 전시되고 〈붉은 포도밭〉 이 팔린다.
오베르의 하숙방에서 80여점의 유화를 그리고
7월 27일,밀밭에서 가슴에 총을 쏜다.
7월 29일, 동생 테오가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둔다.
의사 가셰를 통해 건강회복으로 발작과 불안증세에서 벗어나는 듯 하였으나
결국 쇠약해져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1890년 7월 27일, 초라한 다락방의 침대 위에서
피를 흘리고 누워 있는 그를 라부의 가족이 발견한다.
오베르 성 뒤쪽에 있는 밀밭에서 스스로 가슴에 총탄을 쏜 것이다.
1890년 7월 29일, 테오와 베르나르, 탕기 영감,
가셰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죽음을 맞는다.
그와 가장 많은 교감을 나누었던 동생 테오도 그가 죽은지
6개월 후 1891년 1월 25일 갑자기 건강 악화로 3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불멸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 오베르에 잠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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