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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서울 창경궁 둘러보기~보물이 넘쳐난다.

 

2015년 연초, 창경궁을 찾아서..

오랜만에 만나는 지인과의 약속으로 창경궁에 간다.

점심을 먹고 오후에는 오랜만에 미술관도 가보려 한다.

시간이 된다면 모처럼 영화도 보고싶다.

오랫동안 하지 못했던게 너무 많다.

 

 

 

창경궁은 4호선 혜화역 4번출구로 나와

500m쯤 걸으면 나온다. 물론 버스가 다니기도 하지만

버스를 기다리느니 걷는편이 낫다.

입장료는 천원.만 24세 미만은 무료~어르신도 무료~

 

 

 

 

 

창경궁 정문 홍화문(보물 384호)

창경궁의 중심 부분이 동향이기 때문에 정문인 홍화문도 동쪽으로 세워졌다.

1616년에 다시 세워진 이 문 앞에서 국왕이 일반 백성을 친히 만나기도 하고

앞에 있는 왕실 언덕인 함춘원에 활터를 세워 무과 시험을 치르기도 하였다 한다.

규모는 3칸 대문이지만 좌우로 한 쌍의 십자각을 세워 궐이라는 품격 높은 대궐 형식을 갖추었다.

 

서울의 궁 어느곳이나 마찬가지지만

이제는 쌩쌩 달리는 자동차들 사이 간신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홍화문 지나 명정문 앞에서 바라본 명정전.

 

 

 

 

 

 

 

 

 

 

명정문.

 

 

 

 

 

 

창경궁(사적 제123호)은 1418년 세종이 왕위에 오른 후

왕인 태종을 모시기 위하여 지은 수강궁이 있었던 곳이다.

성종 14년(1483년)에  세조의 비 정희왕후,덕종의 비 소혜왕후,

예종의 비 안순왕후를 모시기 위하여 수강궁터에 명정전, 문정전,통명전 등을 지어

규모를 넓히고 창경궁이라 불렀다.

 

 

 

 

들어와 뒤돌아본 명정문.

창경궁은 창덕궁의 부족한 생활 공간을 보충하여

왕과 왕비뿐 아니라 후궁과 공주 궁인의 처소로도 사용되었다.

경복궁처럼 일정한 원칙을 좇아 경영된 궁궐과 달리

창경궁은 건축 형식과 제도면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세워지고 이용된 궁궐이었다.

 

 

 

 

길게 늘어선 월랑.

월랑이란 대문의 양쪽이나 문간에 붙어있는 방을 말한다.

 

 

 

 

밤사이 아무도 밟지 않은 이곳에 누군가 다녀가셨나 보다~

고양이 발자국보다는 좀 큰것도 같고.

 

 

 

 

 

 

 

 

 

 

 

동서로 길게 뻗은 월랑은 홍화문과 명정문의 남북 양쪽에서 뻗어나온 월랑과 합쳐져

ㅂ자 모양을 이루면서 정전의 좌우 앞쪽을 둘러싸고 있다.

명정전의 남서쪽에는 편전인 문정전과 월랑이,

북서쪽에는 많은 내전과 행각들이 자리잡고 있다.나머지 수천 간의 전각등은

일제에 의해 철거되었다 한다.

 

 

 

 

명정전(국보 제 226호)은

높은 월대 위에 자리잡은 창경궁의 정전이다.

경복궁의 정전 근정전은 국보 제 223호다.

 

 

 

 

문고리 하나에도 역사가 숨 쉬는듯 멋스럽고 고풍스럽다.

 

 

 

 

 

 

임금님이 앉았을 자리.

병풍에 그려진 하얀건 달이고 붉은건 해인가.

한번도 주위깊게 보지 못했던것 같다.

 

오늘은 신하들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셨으려나.

민생을 위해 더욱 애써달라 주문하셨을테고

연초니 덕담 몇마디도 나누셨을테다~

 

 

 

 

 

한땀한땀 정성스레 깍고 다듬었을 문살.

화려한 색과 기교가 들어가지 않아 좋다.

 

 

 

 

월랑뒤로 보이는 고층 건물들.

현대와 과거가 공존하는 풍경이다.

언젠가 저 고층 빌딩들도 역사라는 이름으로 남을 것이다.

 

 

 

 

드므란 방화수를 담는 용기로

화마가 물에 비친 제 모습에 놀라 도망가게 한다는

화재 예방을 위한 상징적인 의미도 크다.

아이러니하게도 드므 우측뒤로 소화기가 비치되어 있다..

 

 

 

 

명정전 월대위에서 바라본 모습.

건너편 서울 대학교 병원도 보인다.

임금님과 가까운 정 1품부터~

예나 지금이나 높은 님 가까이 보려면 품계는 높고 봐야겠다.

 

 

 

 

문정전은 임금이 신하들과 회의를 열고 의견을 나누던

창경궁의 편전이다.

동향인 명정전과 달리 남향 건물이다.편전이면서도 왕실의 신주를 모신

혼전(殿)으로도 자주 쓰였다.

아버지 영조의 손에 죽임을 당한 사도세자의 비극도

문정전이 혼전으로 쓰이는 것과 관련이 있다. 문정전 일원은

일제 강점기때 훼손되었고 1986년에 건물은 다시 세웠으나

서쪽에 있던 담장과 화계정원은 아직 재건하지 못하고 있다.

 

 

 

 

명정전 월랑의 뒤편.

 

 

 

 

 

 

 

 

 

 

 

숭문당은 명정전의 후전에 해당하는 건물이다.

숭문당은 임금이 신하들과 경연을 열어

정사와 학문을 토론하던 곳으로 1830년에 새로 새운 건물이다.

앞쪽에 설치한 누각형 툇마루로 출입하였고 숭문당 현판은 영조의 친필이다.

 

 

 

 

 

 

 

 

 

 

 

명정전의 후전인 함인정으로 나가는 문.

 

 

 

 

 

궁궐에 재난이 닥치지 않도록풍파가 없도록,

기근과 질병이 없도록 잘 지키고들 있는거 맞겠지요~

이상 무~

 

 

 

 

함인정은 문무 과게에 급제한 신하들을 접견하던 장소였다.

1833년에 다시 세워졌고 사방이 터진 개방형 건물이다.

건물 이름 함인정~ 세상이 임금의 어짊과 의로움에 흠뻑 젖는다~

어질고 의로운 그런 사람..

나는 누구를 존경할까~

아버지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빼고..

과거의 역사속 인물들 말고~~

음~~

왜 존경하는 사람이 떠오르질 않지~

존경한다는 말을 하고픈 사람을 만나고 싶다..

 

 

 

 

숭문당과 함인정 앞의 고목하나가 압권이다.

 

 

 

 

 

고즈넉한 궁궐을 걷는 기분도 나름 참 괜찮다.

 

 

 

 

 

그런데 왠 산수유가 이리 많은지.

 

 

 

 

 

 

조금 삭막했던 이곳에 붉은 산수유 열매로

생동감이 넘쳐난다. 붉음이란 그 자체로도 열정이 느껴진다.

봄이면 노란 산수유꽃으로 일대가 화사하겠다.

 

 

 

 

 

관천대(보물 제 851호)

1688년에 축조된 창경궁 관천대는 대 위에 소간의(小簡儀)를 설치하여

천체를 관측하던 시설이다.

계단과 난간만으로 구성한 건축물로 간결하고 힘찬 조형미가 느껴진다.

일제 강점기때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창경궁 정비사업때 제자리로 옮겨왔다.

이보다 조금 북쪽에는 보루각터가 있었는데 그 안에는 자동으로 시간을 알려주던

자격루를 두었다 한다.

참~ 우리 선조들 대단해요~알람이 있었다니요~~

 

 

 

 

창경궁은 역사적 의미를 떠나서라도

점심식사후 가볍게 산책하기도 그만인 곳이다.

 

 

 

 

 

이 길을 걸으면서

덤으로 역사적 사실 하나씩 알아가는 재미도 쏠쏠하다.

 

 

 

 

 

다시 함인정 앞으로 돌아와서.

점심때가 되어선지 사람들이 많이 늘었다.

 

 

 

 

 

옆으로 배배 꼬인 소나무 하나도 멋스럽다.

 

 

 

 

 

좀 흐린날.

숨어있는 태양 아래  멋진 나무와 함께 담는다.

 

 

 

 

 

경춘전(景春殿)  환경전(歡慶殿)

경춘전은 대비의 침전이고 , 환경전은 왕과 왕비의 침전이다.

두 건물 모두 1834년에 재건하였고 원래는 각기 행각을 두른 독립된 영역을 가졌었다.

환경전은 중종과 소현세자가 돌아가신 곳이기도 하다.

 

 

 

 

경춘전은 왕비의 산실청으로도 쓰여 정조와 현종이 이곳에서 태어났다.

정조는 본인의 탄생을 기념해 내부에 誕生殿(탄생전)이라고 친히 쓴 현판을 걸었다.

경춘전 현판은 순조의 친필이다.

 

 

 

 

경춘전 환경전 앞뜰.

 

 

 

 

 

 

함인정 뒤로 젊은 연인이 팔짱을 끼고 걷는다.

그 모습이 좋아 담아본다.

 

 

 

 

많이 내리지도 않은 눈임에도 제설작업을 하느라 바쁘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오늘 내가 지불한 1000원은 편리함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통명전(보물 818호)

통명전은 1833년에 다시 세운 침전의 건물 중심답게

넓은 월대를 쌓고 지붕위에 용마루를 없앴다.

가운데 3칸에 대청마루를 두고 양 옆에 온돌방을 두어 왕과 왕비의 침실로 썼다.

 

 

 

 

통명전 옆 양화당.

양화당은 대비의 침전이었지만

병자호란때 남한산성으로 피난했던 인조가 환궁하면서 여기에 거처한 일도 있다.

 

 

 

 

서쪽 마당에는 동그란 샘과 네모난 연못이 있고

그 사이의 물길을 돌로 공들여 만든 정원이 있다.

 

 

 

 

 

창덕궁과 후원으로 가는 문.

체코나 러시아 사람들인듯..

말은 알아듣지 못하지만 요금을 또 받는것에 대해

한동안 이해못한다는 듯 이야기가 길어진다.

ㅎ.. 나도 처음에 창덕궁에 갔다가 후원 입장료가 따로 있는것에 당황한 적이 있었다.

잘 보존하고 지키려면 우리가 해야할 최소한의 것이랍니다.

 

 

 

 

높은 자리에 자리잡아 전망이 좋은 이 곳에 대비의 침전인 자경전이 있었다.

자경전은 1777년에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앞쪽으론 멀리

아버지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을 향하도록 지었고

뒤쪽으론 아름다운 계단식 후원이 있었다.

한중록의 산실이기도 한 자경전은 19세기 후반 철거되었고

그 후 일제치하때 근대적 왕실 도서관인 장서각이 들어섰다가

1992년에 철거되었다..

 

 

 

 

자경전 터에서 바라보이는 남산타워.

 

 

 

 

 

창경궁과 일대의 고층 빌딩들..

궁궐은 남향이 원칙이지만 창경궁의 중심부분은 특이하게 동향으로 배치되었다.

동쪽에 왕실 동산인 함춘원과 낙산이 자리잡고 있어

그곳을 바라볼수 있도록 지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생활 공간은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창경궁은 자연 지형을 따르면서도

생활의 편의를 추구하여 궁궐을 조성했기 때문에 친근함과

아름다움을 두루 갖춘 궁궐이 되었다. 임진왜란때 다른 궁궐처럼 불탔다가

1616년 재건되었다. 임진왜란과 그리고 일제 강점기..

우리 역사는 일본이라는 수난에 궁궐역시 무사하지는 못했다.

일제 강점기때 건물들을 대부분 헐어내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하여

시민 공원으로 바꾸고 이름도 창경원으로 격하시켰다.

또한 종묘와 연결된 땅의 맥을 끊고 그 사이에 도로를 내어 궁궐의 품격을 훼손하고..

 

결론은 우리가 힘이 없어서였다..ㅠ

그래도 문화재, 유적만큼은 손대지 않았어야 했다.

 

 

 

 

앙부일구 (보물 845호의 모조품)

 

앙부일구는 세종 16년(1434년)에 처음 만들어진 천문의기로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던 해시계의 일종이다.

시계판이 가마솥처럼 오목하고 하늘을 우러러 보고 있다고 해서

이름이 붙여졌다 한다.

 

 

청동의 오목판 안바닥에는 일곱개의 세로 줄이 그려져 있는데

이릉 시각선이라 한다.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면서 생기는 그림자가

이 시각선에 비치면서시간을 알수있다.

바닥에는 24절기를 나타내는 영세개의 가로줄도 있다.

 

 

 

 

 

풍기대(보물 846호)

 

창경궁 풍기대는 대 위에 구멍을 뚫어 깃대를 꽃고

그 깃대에 기를 달아 바람의 방향과 속도를 가늠했던

기상 관측기구다.

 

 

 

 

춘당지.

 

 

 

 

 

춘당지는 창덕궁 쪽 절벽인 춘당대와 짝을 이룬 연못이었으나

지금은 담장으로 나뉘어 있다. 지금의 소춘당지가 원래의 춘당지였고

대춘당지는 1909년에 내당포에 속한 11개 논을 하나의 연못으로 만든것이다.

내당포는 임금과 왕비가 각기 농사와 양잠을

체험할수 있도록 궁궐안에 둔 논과 뽕밭이다.

 

 

 

 

이곳엔 원앙새가 많기로 유명하지만

가지치기 공사중이어선지 어디론가 날아가 버려 휑하기만 하다.

 

 

 

 

 

춘당지 얼음위로 사람들이 던져주는 땅콩이며

과자를 먹으려 까치들이 몰려든다.

 

 

 

 

 

백송이다.

백송은 처음부터 껍질이 하얀것이 아니라 어릴땐 초록이 들어간 푸른빛이 돌다가

나이가 먹을수록 흰 얼룩무늬가 많아진다고 한다.

 

원산지는 중국 베이징 부근이고 조선시대, 사신으로 간 관리들이

귀국할때 솔방울을 가져다 심은것이 여기저기 퍼졌다고 한다.

그러나 성장이 매우 느리고 번식이 어렵다한다.

 

 

 

 

창경궁 대온실이다.

대온실은 1909년에 완공하여 식물원으로 공개한 건물이다.

목조로 된 가느다란 뼈대로 뾰족아치와 창틀을 만들고 유리를 끼웠다.

전체적인 모습은 당시 서양에서 유행했던 수정궁(크리스탈 palace)류의

근대 건축을 연상시키지만 지붕 용마루에 조선 왕실의 문양인

오얏꽃을 여러번 장식한 것이 특징이다.

대온실 앞에는 르네상스풍의 분수와 정원도 함께 조성했다.

 

 

 

 

 

 

 

 

 

관음죽.

크지 않은 실내엔 여느 식물원과 크게 다르진 않다.

갖가지 분재들과 생소한 식물들..크게 부각되는건 없다.

추위도 녹일겸 화사한 꽃 앞에 머물다 나간다.

 

 

 

 

 

나는 왜이리 장미를 오랜만에 보는걸까~

꽃집에 널린게 장미인데.

산에 다닌다고 야생화에만 눈길을 줬었던 것인지

장미를 내손에 쥐어본것이 너무 오래된 것인지..

 

 

 

 

산에서는 늘 하얀 꽃만 보다 분홍의 바위떡풀은 처음본다.

 

 

 

 

 

꽝꽝나무(천연기념물 후계목)

 

 

 

 

 

당단풍,청단풍 분재들도 있고..

 

 

 

 

 

홍천초.

나는 분재엔 크게 관심이 없다.

나는 화려하지 않아도 야생의 꽃을 좋아한다.

 

 

 

 

매화를 닮은것도 같고.

이쁘긴 하다.

 

 

 

 

운용매화란다.

 

 

 

 

 

요 아이는 영춘화.

봄에 필 아이들이 한겨울 온실속에서 피어났다.

 

 

 

 

다시 밖으로 나와서 잘 가꾸어진 정원을 보니

파트리크 쥔스킨트의 향수~ 어느 살인마의 이야기가 스친다.

책으로 읽고 느꼈을때의 강렬함이 영화로 만들어졌을때

실망으로 남는 경우들이 많이 있다.

그나마 향수는 영화로도 괜찮은 편이었다.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를 읽으며

함께 수수께끼를 풀어가고 숨가프게 진행되던 스릴은 온간데 없고

영화는 정말 실망,대실망이었다.

한장 한장 넘겨가며 시간 가는줄 모르던

원작의 그런 연출은 일어나질 못했다.

 

종교를 논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종교계에서 들고 일어난것에

책의 영향력이, 파장력이 얼마나 컸던지를 알수 있던 대목이었다. 

재미를 위해 작가의 상상을 덧붙인 소설이라는거~~

정원을 보다보니 향수로, 다빈치코드로..또 옆길로 샜다..

 

 

 

 

 

 

 

 

 

 

창경궁 팔각칠층석탑(보물 제 1119호)

이 탑은 조선 성종 원년 (470년)에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일제 강점기인 1911년에 창경궁에 이왕가 박물관을 건립할때

상인으로부터 구입하여 세운 것이다.

 

 

 

 

석탑의 기단은 사각형의 받침돌과 팔각의 2층기단으로 되어 있다.

그 위에 놓인 팔각형 돌의 각 면에는 꽃무늬를 새겼다. 팔각의 납작한 돌 위에는

밥그릇을 엎어놓은 듯한 모양의 둥그스름한 탑신 받침을 놓고 화려한 연꽃무늬를

돋을새김하였다.1층 탑신은 위층에 비해 매우 높고, 지붕들은 팔각으로

목조 건물의 지붕처럼 표현하였다.

이 석의 전체적인 형태로보아 공주의 마곡사 석탑과 비교되는

라마탑을 연상케 한다..

 

 

 

 

다시 명정문 앞으로 나오니 학생들이 가득하다.

 

옥천교(보물 386호)다.

정문인 홍화문을 들어서면 대문 안쪽에

명당수인 금천수를 흐르게 하고 그 위에 옥천교를

건너는 상징적인 마당을 만들었다.

이 마당을 둘러싼 외행각은 궁궐을 지키는 관원들이 사용하였다.

 

 

 

 

1983년 12월부터 1986년 8월까지 약 3년간에 걸쳐

궁궐 본래의 모습으로 복구하는 중창공사를 실시하여

창경원으로 격하된 이름을 창경궁으로 바로잡고, 궁 안에 있던

동물원과 놀이시설을 철거하고 문정전, 빈양문, 명정전, 월랑등 일부

건물들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잊는 순간부터

우리는 또다시 현대의 식민지가 될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잘 보존하고 남겨야 할 우리의 문화재..

이제부터 우리에게 남겨진 의무이자 숙제가 되었다.